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를 전제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그것의 타락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일관된 지향성과 그 능력을 늘 염두에 두고 그 길 위에 이야기를 풀어간다. 더불어 하나님의 일관된 창조의 능력과 사역을 막아서고 저항하고 방해하는 "물"로 상징되고 인격화된 파괴와 혼돈의 세력을 함께 포착한다. 출애굽기의 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경계를 넘나드는 악의 세력으로 그려지며 하나님의 형상된 이들을 노예로 삼고 놓아주지 않는 거대한 반역이다. 이 물의 세력을 끝내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통제에 순복하는 물로 변화시켜 가는 모티브가 출애굽기 전반에서 발견되는 모티프다.
이 물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조는 물의 경계를 지으셔서 철저히 하나님의 통제 아래 두시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우선 하나님은 물이 범람하여 혼돈과 공허함으로 뒤덮인 땅에서 물을 몰아 한 구역 안에 가두고 다스리시며 그 창일함을 바다라 명하신다. 뿐만 아니라 이 물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진 영역을 땅으로 명하셨다. 즉 땅은 물의 압제에서 놓인 자유와 해방과 평화의 공간을 말한다. 하나님게서는 그 땅의 중심인 "에덴"에 자신의 형상이자 대리자인 사람을 두시고 그 공간을 점진적, 점층적 아름다움으로 개간해 가게 하셨다. 심지어 하나님께 굴복한 물의 깊이 전부를 이 사람이 다스리고 돌보게 하셨다.
하지만 연이은 죄와 타락은 이러한 하나님의 규정과 질서의 범위를 균열시키고 붕괴에 이르게 한다. 따라서 물은 다시 하나님의 다스림의 영역을 범람하고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람과 자연을 해치며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이제 물은 심지어 하나님과 그의 대리자인 사람의 다스림의 역할을 침탈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애굽의 나일강은 그 침탈의 존재로서의 물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해마다 우기가 되면 나일강은 그 수위가 높아 둑을 범람하고, 그 주변 생명체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시전한다. 누구보다 강한 자로 스스로를 과시한다. 그 물이 범람한 자리에 퇴적된 토양은 비옥하기 그지 없어서 그곳에 뿌려진 곡식은 늘 결실의 풍요로 이어진다. 물은 사람과 자연을 두려움에 떨게하는 동시에 그 두려움 앞에 굴복한 사람들에게 풍요를 선물하기도 하는 것이며, 따라서 물의 신적 지위는 더욱더 사람들 사이에 높아져만 간다. 이 풍요의 소문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국가와 제국을 이루고 그 세력은 날로 더해만 간다.
물의 범람이 만들어 준 비옥한 델타의 토양은 그 아름답던 에덴의 모방이다. 아름답고 순전한 순종의 모습으로 자리했던 에덴의 강들이 아닌 스스로를 과시하는 세력으로서 땅을 지배하는 이 물은 에덴보다 아름다운 풍요의 땅 델타를 선물하고 그 땅의 지배자로 자리매김한다. 출애굽기에는 이 물의 상징과 이미지로 창일하다. 나일강, 홍해, 광야의 물들, 요단강, 이른 비와 늦은 비 모두 하나님과 물의 관계적 역동 안에서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특히 출애굽의 과정 속에서 물은 하나님의 창조적 권세와 질서에 대한 노골적 대적의 주체로 분(扮)하는데, 바로 왕은 바로 이 물의 세력을 지배하는 폭군으로 등장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신 복된 명령(창 1:28)과 그 성취(출 1:7)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도발한다.
결국 바로는 물의 지배자로서의 파괴적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밖에 없다. 히브리인 신생 남아 살해 명령은 범람하는 나일강 물의 극대화된 파괴력을 시사한다. 나일강이 직접 하나님의 언약의 수행자가 될 히브리 남아들의 무덤이 된다. 언약의 계승을 단절시키려는 의도다. 하나님의 창조 언약의 잠재적 수행자들을 그들의 가장 나약한 처지에서 죄다 주검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심판은 이 물에 대한 특히 나일강에 대한 심판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어쩌면 열 재앙은 모두 하나님께서 애굽의 물에, 그 물의 지배자에게 던진 심판의 일련일 지 모른다.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재앙은 먼저 강물이 피가 되게 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물이 피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명령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물의 심장에 심판의 칼을 찔러 넣었음을 뜻한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물은 이제 생명력을 잃게 되고, 물의 시체는 연쇄적인 죽음과 부패와 그 증폭으로 이어진다. 개구리, 이, 파리, 독종, 전염병 등으로 이어지는 모든 심판들은 죽어서 더이상 생명력을 지니지 못할 뿐 아니라 죽음의 현상 즉 부패하고 변질의 확산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끝은 히브리인의 아들들의 무덤이 된 물의 지배자와 그의 백성들의 아들 죽음으로 이어진다. 창세기에서 가인에게 죽임 당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 호소하듯, 강에 던져진 수 많은 아이들과 어머니의 고통 역시 하나님의 청각에 호소한다. 나일은 이제 물의 지배자과 그의 고귀한 이들의 아들들이 죽어 던져진 무덤이 된다.둘로 처참하게 갈라져 애굽의 군대의 무덤이 되어버린 홍해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궁극을 이룬다.
따라서 이후로 광야의 여정에서 등장하는 물은 이제 하나님의 다스림에 다시 복종의 자리를 되찾은, 생명의 필수품으로, 더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과 그의 자손들을 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분한다. 창조의 질서에 대한 혼돈의 역습은 어떤 에이전트를 보내든 결국 하나님의 선한 사역의 도구로 변화하고 만다. 그 이야기 속에 언약의 수혜자요 수행자로써 정체성을 발견해 가는 택한 사람들의 삶의 역동이 바로 출애굽기의 긴 스토리 라인이다. 에덴을 모방한 델타의 퇴적층에 가중하여 축족된 풍요는 마치 이 물이 생명을 주는 창조자인양 창조의 질서를 왜곡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출애굽 이야기에서 이 교만하고 거짓된 물의 목을 꺾으신다. 이미 여러 세대 전 흉년으로 인해 목이 꺾인 애굽의 풍요가 요셉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의 지혜로 회복되는 사건을 통해 애굽의 물의 거짓을 폭로하셨다. 그러나 이 요셉의 이야기를 거부하는 새로운 바로의 등장 앞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물과 그들의 비옥한 델타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태동하게 하는 모판으로 사용하시는 동시에그 자체의 교만한 몸짓만큼은 철저히 징벌하신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도 이 물의 지배와 여향력은 위세를 떨치고 있다. 자신의 생명이 물에 있다고 오해하듯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력이 권력과 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물이 생명의 필수재이긴 하지만, 그 생명 자체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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