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4: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의 주해는 야고보서 본문 해석의 난제 중 하나다. "~하신 말씀" (직역하면 "말씀하시길")이라는 표현은 구약 인용의 전형적인 표지인데 실제로 구약성경 상에는 약 4:5절과 일치하는 구절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석과 논문들을 살핀 결과 4:5은 직접 인용구가 아니라 4:6 하반에 직접 인용된 잠언 3:34의 전반 즉 “하나님이 교만함 자를 물리치시고”에 대한 야고보의 해석과 적용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마음 안에 성령이 거하게 하셔서 그를 하나님의 사람 즉 하나님의 신부가 되게 하셨는데, 그 성도들이 두 마음을 품고 세상과 하나님 모두를 남편으로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기에 급기야 자기 아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맹렬한 질투로 즉 진노의 심판으로 변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그 심판을 "헛되이" 혹은 가벼이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약 4:5의 하나님의 질투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질투로 이해했고 이를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좀 더 섬세한 주해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결론은 기존의 이해와 사뭇 다르다. 야고보는 잠언 3:34,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를 해석하고 적용하여 "우리 속에 성령이 거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너희에 대한 사랑을 맹렬한 질투로 변하게 하기까지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또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해당 잠언 인용구의 후반절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를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라고 역시 해석 및 적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약 4:5의 주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성령"이 아니라 6절의 주어인 "하나님"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듯하다 (물론 다른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4절 초두의 호칭 "간음한 여인들아"는 실제 간음한 여인들을 부르는 말이기 보다는 경건의 모양 뒤에 정욕을 감추고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그를 따르는 이들의 "두 마음" 즉 영적인 간음을 질타하는 말이다. 영적인 간음을 일삼는 위선적인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맹렬한 질투의 불길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향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 안에 성령이 거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간음은 성령이 거하신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신성모독이며 또한 성령의 인침으로 인해 하나님의 신부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배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인들을 향하여 심판의 진노를 초월하는 은혜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셨다(6절 상반). 하나님의 이 은혜의 작정은 이후로 반복되는 잠 3:34 하반절의 재진술의 모든 조건들에 대한 대전제로 작용한다. 잠 3:34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씀은 신자의 겸손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이어지는 야고보의 해석과 명령어들 역시 조건과 전제의 형식으로 반복된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면"(7절), "하나님을 가까이하면"(8절), "죄인들이 그들의 손과 그들이 품은 두 마음을 고쳐 성결하게 하면" (8절), "애통하며 회개하면" (9절), "주님 앞에서 낮추어 겸손해지면" (10절) ... 하지만 야고보는 이 조건과 전제에 앞서 이미 은혜 베풀기로 하신 주님의 작정을 말한다.
야고보서를 수신하는 공동체는 아마도 예루살렘의 박해를 계기로 피신하여 소아시아 이곳 저곳에 흩어져 정착한 "디아스포라"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에게 안정적인 삶의 환경은 너무나 절실한 생존의 요건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교회의 지도자는 그들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유하고 유력한 헬라인들"에 대한 제3의 신앙의 길을 제시한 듯하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므로 굳이 할례를 받을 필요도, 경건의 의무에 신경쓸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쉐마 신앙고백의 의미를 이해하고 함께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였을 것이다. 약 2:18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는 이러한 신앙과 경건의 요구에 있어서의 층위를 나누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적 타협은 결국 윤리적 과오로 이어지고 교회의 분열로 이어지고 말았다.
공동체의 지도자가 야고보 사도의 편지 앞에 변명할 수 있는 말들은 얼마든지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터이다. 위태로운 공동체의 안전과 안녕을 위한 최선의 선택으로서의 신학적 타협과 윤리적 차악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 정당화는 오늘 우리의 목회의 현장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문제이고 오날 한국 교회의 과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위선이 정작 하나님 앞에 어떤 설득력을 가질 것인가? 하나님을 대면하면서도 그저 나뭇잎으로 수치를 가리기에 급급했던 아답처럼 "구함" 즉 기도라는 경건의 모습으로 적용을 숨기려했던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야고보는 말한다. 그 갈라진 두 마음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다만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의 길 하나가 열려 있다. 이런 우리의 위선을 마주하며 우리 앞에 오셔서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오심이다. 야고보가 말한 "더 큰 은혜"이다. 회개와 겸손의 전제보다더 더 앞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이미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성령의 강림이라는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신 그리스도 특별한 은혜가 우리의 회개에 앞서 있다. 그리고 은혜는 은혜를 부른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정하신 주님께서 회개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형 예수를 미워하기에 충분하고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야고보에게 주님이 찾아오신 것처럼 위선의 범죄에 찌들어 있는 우리에게 주님이 변함 없이 오셨고 또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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